한국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전쟁의 성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1. 전면전이 아닌 제한전

초기에 인민군의 목표는 단기간 내에 서울을 점령하여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통일을 이룩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속전

속결로 처리하려 했던 것이었다.

남한의 주병력은 모두 38선 근방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주력부대만 깨면

손쉽게 서울을 점령하고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좌측에 옹진반도, 중앙에 개성, 포천 우측에 춘천 방면에서 6.25전쟁이 시작

되었다. 즉 개성 포천에서 주력부대가 돌파하여 서울을 공격하고 춘천 방면에서

국군 6사단 7연대를 돌파해 한강을 따라 수원으로 진격하여 퇴로를 끊는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춘천방면에서의 원활하지 못한 전투로인해 퇴로를 막지 못했고

이승만 정권은 대전으로 이동했다. 화력에서 탱크등으로 중무장한 북한 병력은

산악지대인 춘천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소양강과 북한강이 가로막고

있는 춘천을 쉽게 공략하지 못해 결국 서울이 점령되는 6월 28일에서야 간신히

점령하고 만다. 그것도 국군의 퇴로를 생각한 작전상 후퇴로 말이다.

이로인해 전쟁은 장기화 되기 시작한다.

2. 국제전

전쟁이 길어지면서 미군이 투입되기 시작한다. 특히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인해 전쟁 초기 부터 전선은 남으로 밀렸지만 북한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북한은

잿더미가 되었다. 북한의 소련제 야크기는 떠보지도 못하고 완전히 제공권을

내주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평양이 함락되고 추수감사절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북진하였다.

다급한 북한은 중국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중국은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계급도 군대깃발도 모두 없애고 의용군 형식으로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약 20만의

병력을 참전시켰다.

남쪽에서는 인해전술이라고 부르는 중국군의 유격전으로 인해 두만강까지 진격

했던 미군과 한국군은 퇴로가 끊겨 한국군 6사단은 거의 전멸하다 시피했고

그 유명한 흥남 철수작전이 전개되었다.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1.4 후퇴로 다시한번 서울을 내 주었으나 전세가 회복되어

이 후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교착상태는 그 후 2년

반이나 계속되었고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가 극에 달했다.

만약 휴전회담이 교착상태가 시작된 1951년 봄에 끝이 났다면 그렇게 한국전쟁의

그 커다란 희생은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