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한국전쟁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곧바로 소련군이 참전하여 두만강을

건너 청진으로 진격했다. 8월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고 소련군은 미국과

의 약속대로 38선 이북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북한지역을 점령했다.

북한지역 주민들은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고 소련군과 함께 따라

들어온 김일성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서울에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설치되어 총독부 엔도경감으로

부터 치안권을 넘겨받고 전국의 각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창설 치안유지에 힘썼다.

9월에는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하고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도 개인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38선 이북의 북한에는 만주와 연해주 시베리아 및 중국 연안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좌파 독립운동세력이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소련과 친분이 있던 김일성을

중심으로 당시 가장 큰 서민경제의 폐해였던 지주와 소작인간의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개혁(임야 포함)을 단행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토지를 빼앗긴 지주들이 대거 월남하여 서울에 모여들었다.

반면 남쪽에서는 46년 정읍을 방문한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발언 임정계열과 북측의 반발을 샀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으로 곡물가격이 천정부지로 앙등하여 국민들의 피해가 매우 심각했고 각지역의

공장에서는 파업이 끊이지 않았다.

신탁통치 찬반문제로 인해 좌익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고 미군정은 좌익을

불법화하여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미국은 20년에서 30년간 신탁통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지말고 즉각 독립을 시켜야한다는 입장이었는데 타협안으로 5년이 결정되었던

것이지만 국내에는 반대로 와전되어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고 좌익에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었다.

좌익은 5년간의 신탁통치는 명목상의 조치일 뿐 실제로는 신탁통치기간에

한국인의 과도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고 5년간의 과도기를

거쳐 독립한다는 안이었기 때문에 찬성했던 것이다.

결국 1948년 이승만은 친일정치가 및 지주 자본가계층이 만든 한민당을 등에업고

5.10 총선에서 승리하고 국회의원의 투표로 선출하였던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었

다.

1948년 8월 15일 38선 이남에서는 대한민국정부가 미군정으로 부터 독립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였고 이에 대해 38선 이북에서는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건설되었다.

한편 김구 및 임정계열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에 대해 남북을 분열시키고

민족의 비극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선거에 불참하였다. 일부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친일파 척결을 위해 반민특위를 구성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이 조작한 국회 프락치사건등을 통해 와해되었다.

남한은 1949년에 와서야 간신히 토지개혁이 아닌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형식을 띄어 결국 소작농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이 개혁마저도 당시 지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었다.

한편 1949년에 들어서면 해방전 만주에서 중국군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동북항일연군 팔로군 소속 조선인 부대 3개사단이 북한으로 넘어 온다.

1948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은 남한에서 미군도 철수하라고 압력을 가한다.

미국은 1949년 5백여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겨둔 채 미군을 철수시킨다.

1950년 6월 25일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이 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