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도대체 어느 부분이 호평을 받는건지…

먼저, 봉준호 감독과 그의 작품을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께

 

여기 쓴 영화평론은 본인의 시각에서 본 것이며, 평론 연구를 하고 현재도 평론을 쓰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쓴 글임을 밝힙니다.

 

 

아울러 저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소위 ‘맞짱’뜨고 싶으시다면 정확한 근거와 저의 오류를 지적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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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더’는 다른 말이 필요없이

 

봉준호 감독의 세상에 대한 비난과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라 보여진다.

 

 

일단 평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모든 문학, 예술은 발표된 이후에는 그 어떤 작가나 감독도 그에 손을 댈 수 없는 완성된 세상이라는 전제를 두고 말하려 한다.

 

 

이 영화는 ‘미쳐버린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식에게 미친, 자신의 과거를 잊고 싶어하는 엄마의 미친 자식에 대한 모정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비치는 동네의 모습은 부조리가 만연하고, 일반적 도덕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들이 암암리에 혹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도준(원빈 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시각도 이중적이다.

 

한 부류는 ‘사슴같은 눈을 가진 선량한 사람’으로 파악하는가 하면, ‘발정난 개’로 보기도 한다.

 

이는 진태(진구 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을의 백수이자 망나니인 그를 좋아하는 미나(천우희 분)와 미나엄마(조경숙 분), 도준과는 친하지 말았으면 하지만 돈만 주면 도와주기에 어쩔 수 없이 믿는(?) 도준의 엄마(김혜자 분)

 

살해당한 아정(누구인지.)도 마찬가지이다. 죽임을 당함에 불쌍하게 나오기도 하지만 ‘쌀떡소녀’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원조교제와 그에 대한 슬픔이 나오기도 하지만 소위 변태폰으로 찍은 원조남들의 사진을 보유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들이 인물의 이중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중적 면모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난 사람들-도준을 치고 달아났음에도 벤츠를 타는 대학총장이라는 직책으로 적반하장을 하는 인간과 자신의 남편이 공무원임에도 도준의 어머니 가게와 모종의 거래를 하는 여자,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살해를 당하자 자신의 딸인 것처럼 큰 소리치고 도준의 엄마의 뺨을 때리는 담배피는 여자와 아정의 친척들-이지만 모두들 이중적 삶을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도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하나. 사랑을 보여준다.

 

그것도 절대 깨어지지 않는, 철저한 자기희생의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고귀하고 순수하며, 자식의 모든 것을 보듬는 자애의 사랑을 이 영화는 한번 꼬아서 제시한다.

 

도준이 어릴 때 농약을 타서 죽이려는 모습 그것에 대한 죄책감과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여주는 ‘나쁜 기억을 없애주는 침’이 모정이라는 아름다움에 흠을 가한다.

 

또, 자신의 아들은 나쁜 짓을 절대 하지 않았다는 철저한 믿음과 이를 깨뜨리려는 자들에 대한 응징에서 도준 엄마의 모성은 결코 올바른 모습을 띠지 못한다.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찾아나선 길이 오히려 유죄를 증명하게 되고, 이를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행해지는 폭행교사와 살인 및 방화 등은 우리에게 아름다워야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부분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볼 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과 짜증을 일으킨다.

 

 

미친 세상에 사는 미친 모자의 미친 사랑이 바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 전부이다.

 

아니 한가지를 더하자면 미친 자식도 그 어머니에게만은 보호의 본능을 지니고 있음이 조금은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평론할 때는 절대 모티프 혹은 장면별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씬 위주 즉, 장면의 상징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장면의 상징성으로 이루어진 영화의 경우 그 인과성이 대단히 중요한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에 철저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살해당한 ‘아정’은 치매인 할머니의 보호자로 대단히 가난한 집안의 가장으로 나온다. 하지만 장례식 장에서 보인 친척들은 한 둘이 아니다. 게다가 그녀의 죽음에 뭔가 어색할만큼 강한 슬픔들을 느끼고 있다. 그런 감정을 느낄 정도라면 ‘아정’이 ‘쌀떡소녀’가 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은 아무리 영화라고해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진태와 도준 어머니의 관계도 굉장히 모호하게 진행된다. 자신을 고발했기 때문에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너’라는 말을 쓰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사실 이 부분을 놓고 어느 평론에서는 진태와 도준 어머니가 성적관계를 맺었다고 말을 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항은 영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기에 과장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영화의 많은 부분이 이 영화는 ‘장면의 분석’을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스토리 중심’의 영화임을 확인시켜 준다.

 

 

아울러 영화의 시작과 끝이 도준 어머니의 춤으로 시작되고 끝을 맺고 있는데 이 부분이 유일한 상징성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 조차 도준 어머니의 내적 심리와 갈등을 표출하는 것이며, 우리 전통 극장르인 ‘탈춤’에서의 ‘춤’의 기능을 차용한 것일뿐 특별한 상징성을 찾는다는 것은 오류라고 판단된다.

 

 

 

정리하면,

 

지금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마더’는 부조리와 양면성을 지닌 현실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조차 진정 아름다울 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고 누가 도준의 어머니에 대해 ‘정말 아름다운 모성애’라고 할 것이며, 도준이 어머니의 침통을 전해주며 우리에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느끼게 하려는 행동도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많이 찝찝한 영화이다.